학파가 연구하던 소옹(邵雍) 상수학(象數學)이나 역학, 잡학 등 국정 운영에 필요한 학문의 발전을 가져왔다. 더불어 서인-남인 연립정권이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했기 때문에 퇴계 이황의 학문과 율곡의 학문이 활발한 교류를 통해 융합되는 면모를 보였다. 이는 후에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의 이론
다양한 사상적 대립을 철학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역사적인 측면에서 간단하게 분석?정리하고, 그로 인해 파생된 정치적 분립(分立)도 함께 살펴보았다. 이렇게 소설 속에 나타난 사상들을 정리하다보니 저자 이인화가 생각보다는 치밀하게 소설에 대한 배경을 연구한 흔적들이 곳곳에서 엿보이면서
Ⅰ. 주자학(성리학)의 기능
인간들의 상호관계를 규정하는 체계적인 이념→ 군신․부자․부부의 관계를 상하의 주종관계로 규정한 삼강은 오륜의 핵심이다.
1. 효
인간이 평생 지켜야 할 도리이다. 모든 행위의 근원인 동시에 모든 사회관계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강조되었다.
효가 임금에
Ⅰ. 주자학(성리학)의 전파
한국에 성리학이 들어온 것은 고려 말기, 충렬왕을 호종하여 원(元)나라에 갔던 안향(安珦)이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져와 연구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성균관의 유학자들에게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으로서 새로운 학풍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
1)훈고학
훈고학의 발전배경: 진(秦) 시황제(始皇帝)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과, 한초(漢楚)의 흥망, 그리고 진(秦)에서 한초(漢初)에 걸쳐 한자(漢字)의 일대 변혁이 있어 짧은 기간 동안 학문적 단절이 있었다. 그래서 한나라 이전의 서적을 읽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한나라 때는 유교가 가장
이론(人物性異論)을 호론이라고 한다.
18c 이전에도 인성과 물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본격적인 논의의 시작은 권상하의 문하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권상하는 기호학파의 맥을 계승한 인물이며, 인물성동이 논쟁의 주인공이 되는 이간과 한원진은 바로 권상하의 문인이다.이들의 실질적인 논
기호학파의 학맥에 놓여 있으면서도 율곡을 비롯한 기호학통의 인물들을 모두 젖혀두고 우암을 끌어올려 주자에 직접 연결시키고 있는데, 이는 바로 그가 그의 핵심적 학풍인 위정척사의 의리론적 인식을 우암과 주자에서 찾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화서가 호락논쟁의 어느 한 쪽으로
이론논쟁은 호락논쟁으로 대표되는 심성론에 대한 관심을 부활시켰다. 이러한 성리학의 교조화 현상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탈성리학 경향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II. 조선후기 성리학적 분파
1.영남학파(嶺南學派) 성리학의 특성
(1)퇴계학파(退溪學派)
이황과 그 문인 후학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논쟁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을 특징짓는 양대 논쟁이 될 만큼 중요한 논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2.본론
(1) 논쟁의 발단
한국에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에 관한 논쟁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에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수암 권상하(遂庵 權 尙夏, 164